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문단 편집) == 전개 == [[파일:일본군 경복궁.jpg|width=500]] 당시 조선군 경군(京軍) 중 상당수가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위해 한양을 비웠던터라 경복궁을 경비하던 병력은 장위영(壯衛營)과 통위영(統衛營) 병력 일부, 평양기영(平壤箕營)[* 장위영(壯衛營)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 중앙군이였던 [[친군영]] 중 전영과 좌영을 통합한 부대로 한양의 방위를 맡았고, 통위영(統衛營)은 친군후영과 우영, 그리고 기연해방영을 통합한 부대로 한양 및 수도권을 위수지역으로 하였으며, 경리청(經理廳)은 통위영에서 구 총융청 병력이 분리되어 창설된 부대로 북한산성 일대에 주둔하였다. 기영(箕營)은 평안감영을 지칭하는 것인데,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경군이 이동하자 정예인 평양 군대가 임시로 한양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병력 일부에 불과하였다. 한편 인근 [[북한산성]]에는 경리청(經理廳)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경복궁]]까지 거리가 있는터라 일본군이 고종을 사로잡을 즈음에서야 경복궁 주변 지역에 전개된 상태였다.[* 결국 경리청(經理廳) 병사들은 일본군과 교전도 하지 못하고 무장해제 당한다.] 경복궁 기습 점령에 대해 당시 일본은 '경복궁과 그 주변에 있던 조선 군대가 먼저 발포하여' 일본군이 할 수 없이 응전하고 왕궁에 진입했다며 조선 책임설을 주장하였다. 침략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해당 주장은 현재까지도 일본의 공식 입장이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40207/60639676/1|#]] 하지만 딱 한세기 후인 1994년 일본 후쿠시마 현립 도서관에서 발견된 일청전사 (日淸戰史)[* 당시 일본군 육군참모부 제작]에 의하면 당시 청일전쟁의 구실을 찾던 일본은 조선 정부에 청군 축출을 지시하라며 압박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응하지 않자, 주한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는 7월 20일 용산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에게 경복궁 포위를 제안하였고, 그의 주도로 23일 경복궁 습격이 추진되었다. 정리해보면, 갑오사변은 조선군의 자극으로 벌어진 우발적인 충돌이 아니라 치밀하게 짜여진 일본의 조선 수뇌부 장악 계획이었던 것이다. 당시 서울에 주둔한 오시마 혼성 [[여단]]의 병력은 8천 원정군의 절반인 4천 명이었고, 이 중 1천여 명이 경복궁 전투에 동원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